현대미술 101

삽질하네.

문득 이런 때가 있다. 오늘보다 조금 더 나아질 내일을 위해 하루를 열심히 살다가도 좀처럼 눈앞에 확연히 보이지 않는 성과에 허무함을 느낄 때. 나를 하얗게 태워가며 가까스로 목표한 바를 해 내지만, 그 성취감은 일시적이며 세상은 이런 나의 노력에는 관심도 없는 듯할 때. 또다시 몰려오는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내 열과 성을 쏟을 무언가를 찾아 헤매기를 반복한다. 지친 하루의 끝.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오늘을 돌이켜 보다 입에서 툭 하고 튀어나와 버린 한 마디.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어김없이 미술관을 찾는다. 여전히 난해하다. 한쪽 벽면에는 수많은 사람이 일 열로 줄을 지어 모래 언덕을 옮기겠다고 삽질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다. 한국에서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표현 중에는 ‘삽질한다’라는 말이 있다. 쓸모없는 일을 하거나 헛수고하는 모습을 일컫는 대표적인 말이다. 이 영상이 딱 그 모양이다. ‘뭐야, 저 사람들 삽질하네? ㅋㅋㅋ’ 하며 코웃음을 쳐본다. 그러다 문득, 삽질에 꽤나 진지해 보이는 영상 속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이 삽질이 과연, 삽질일까?’

15분이 조금 넘는 이 영상은 벨기에 출신의 미술작가 프란시스 알리스(Francis Alys)의 <신념이 산을 옮길 때(When Faith Moves Mountains)>, (2002) 라는 행위 예술 프로젝트의 촬영본으로, 페루 리마 외곽에 위치한 약 500미터 높이의 거대 모래언덕을 500여 명의 현지인들을 동원하여 옮기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상 초반에는 모래언덕 옮기기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 참여자들의 반응을 볼 수 있다. 대부분 참여자는 이건 시간 낭비에 말도 안 되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하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는 황폐하고 소외된 리마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참여자들은 각자가 가진 조금의 신념을 가지고 모래언덕 옮기기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 Link to :프란시스 알리스(Francis Alÿs)의 <신념이 산을 옮길 때(When Faith Moves Mountains)>, (2002)

모래언덕을 옮기는 과정은 절대 쉽지 않았다. 참여자 인터뷰에 따르면, 하루 종일 진행된 작업은 고문과도 같았다고 한다. 그들은 뙤약볕 아래, 허리를 굽힌 채 바람에 흩날리는 모래 먼지를 들이켜가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고된 육체노동의 끝을 알리는 신호가 울린다. 과연 모래언덕은 옮겨졌을까? 측량 결과, 실제로 모래언덕은 원래의 위치에서 약 4인치 정도 이동되었다. 고작 4인치밖에 안 되는 미미한 변화이지만 참여자들은 ‘할 수 있다! 해냈다!’라고 외치며 서로를 부둥켜안고 성취감을 만끽한다.

 

리마 지역 사람들의 삽질은 삽질이 아니었다. 프란시스 알리스는 이 작품을 통해 일시적인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가치를 공유하고, 의미를 만들며 관계를 형성해가는 일련의 과정을 전시를 통해 대중에게 선보이며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그의 예술 철학인 “Maximum effort, minimum result (최대한의 노력으로, 최소한의 성과를)”이 고스란히 보여주는 ‘신념이 산을 옮길 때 (2002)’는 어찌 보면 헛짓거리로 보일 수 있는 삽질이 역설적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프란시스 알리스와 참여자들은 무의미하고 무모할 수 있는 모래언덕 옮기기 행위를 통해서 희망과 작은 변화라는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냈다. 페루 정부조차 관심을 두지 않는 낙후된 리마 외곽지역, 외부 사람들은 리마 지역 사람들이 모래언덕을 움직였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지만 참여자들은 개의치 않는다. 일시적인 이벤트로 끝이 났지만, 모래언덕을 움직인 이날의 이야기는 리마 사람들과 우리의 입을 통해 전달되어 계속해서 살아 숨쉬고 그 의미를 확장해 나간다.

현대 미술을 통해 우리의 삶을 본다. 현대 미술은 감상자들에게 신선한 질문을 던져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사고의 전환을 일으킴으로써 삶의 변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예술, 특히나 현대 미술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그들만의 세상 속 이야기라는 말은 정말 억울한 누명이 아닐 수 없다.

감자는 오늘도 고군분투한다. 이렇게 거창하게 있어보이는 척, 인생을 통달 한 척, 어설픈 지적 허영을 마음껏 부려보지만 현실은 mashed potato. 마감에 쫓겨 써 내려가는 이 글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이게 다 의미가 있다.’

아니, 이게 뭐라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휘몰아 치는 폭풍과 같은 세상속에서의 나날들에 정신과 마음이 지쳐 갈 때면 망설일 것 없이 시카고 미술관으로 향한다. 작가의 이름은 잘 몰라도 살면서 한번쯤 본 적이 있는 그림들과 예술 작품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작가가 살던 시대로 여행을 떠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특별 할 것 없는 우리의 일상을 작가의 시선으로 구현해 낸 작품 속 순간의 모습들과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감상하며 휴식을 취해보기도 하고, 얕고 넓기 짝이 없는 잔 지식들을 뽐내며 지적 허영심을 부려보기도 한다.

시카고 미술관에 전시된 약300,000여점 가까이 되는 다양한 미술 작품 중에서도 오늘 내가 이야기 할 잘품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무제-LA에서의 로스의 초상화 (1991) 이다. 먼저, 제목을 듣고 이 작품이 어떠한 모습일지 머리속으로 충분히 상상해 보자. 자, 3초 준다. 나는 한국인 이니까.



하아ㅏㅏㅏㅏㅏ나,





두우ㅜㅜ우ㅜㄹ,





둘 바아ㅏㅏㅏ안,







셋!








어떠한 이미지를 떠올렸는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초상화” 라는 작품의 제목을 듣고, 한 인물의 얼굴이나 형상을 표현한 그림이나 사진, 더 나아가서는 조각상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 작품은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깨부순다. 형형 색색의 사탕 한 무더기가 저기 미술관 한 귀퉁이에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다. 이게 초상화라니. 세상에. 1차 문화 충격에 어질어질한데, 곧 2차 문화 충격이 가해진다. 사탕을 가져가서 맛을 보라고? 이게 미술이고 예술이라고? 예술이 이렇게 가벼워도 되는 건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무제-LA에서의 로스의 초상화 (1991)은 기존의 미술 작품들이 가진 보편적인 특성과는 다른 개념의 작품이다. 간략히 작가의 배경과 작품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토레스는1980-90년대 미국 뉴욕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쿠바 출신 미술가이다. 그가 선보이는 “작품”이란 작가의 생각이 응축되어 표현된 하나의 불변의 존재(물체)가 아닌 작가 개인의 경험과 그 이야기들을 담은 매개체로 관객들과의 상호 작용과 소통을 통해 만들어진 의미와 그 경험을 “작품”으로 보았다.

Felix Gonzalez-Torres : “Untitled” (Portrait of Ross in L.A.) (1991)

알록달록한 사탕 더미, ‘무제-LA에서의 로스의 초상화 (1991)’는 그들의 작품들 중 이러한 특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작품이다. 토레스는 그의 연인인 로스가 죽기 전 건강했던 때의 체중 (175lbs)만큼 전시장에 사탕을 채우고 관객들이 자유롭게 가져가 맛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점점 줄어드는 사탕은 연인의 죽음과 소멸되는 육체의 은유적인 표현으로, 사탕의 양이 줄어들면 전시 담당자는 사탕의 무게가 175lbs에 맞추어 지도록 그 양을 다시 채운다. 작품이 가진 표면적인 주제는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과 상실, 소멸이지만 그 너머에는 더 깊은 의도와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작가는 작품으로 관객들을 초대하고 적극적으로 참여 할 것을 유도한다. 마침내 관객의 참여로 인해 이 작품은 완성이 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사탕(오브제)가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개념과 메세지는 관객에게 경험되고 체험되어 관객들 속에 녹아 들며 확산된다.

미술관에 있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보안과 보존의 이유로 관객이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작품과 관객사이에 존재하는 선을 조금만 넘어도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는 경고음이 울리며 경비원은 관객에게 조심하라며 주의를 준다. 경고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당혹스러운 경험을 한번 겪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왠지 모르게 미술을 감상 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진다. 난 그냥 더 알아가고 싶었던 것 뿐인데…더 나아가서는 위축이 된 나머지 그저 먼 발치에서 작품을 바라보며 가까이 갈 수 없는 그 무엇의 존재로 미술(예술)을 이상화하고 동경하거나,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의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말하며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포기해 버리고는 한다.뭐 그리 대단한거라고…엄청 비싸게 구네…쳇..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무제-로스의 초상화를 통해,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 벽을 허물고 그 간극을 좁혀가려는 작가의 노력을 본다. 이는 예술과 우리의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틈을 좁히려는 노력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에 존재하는 간극에도 적용 해 볼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이 두려워 경계를 허무는 것에 조심스러울까? 하는 질문을 해본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는 집단 혹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과 특수성을 잃게 될까…하는 우려에서 비롯된 요인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안과 보존을 위해서인 셈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땅히 이래야만 한다는 정형화된 엄격하고 진지하고 근엄한 이미지를 내려놓고, 조금은 친근한 모습으로 먼저 타인을 초청하고 맞이 하는 건 어떠할까? 조금 가벼워보이면 어때? 가벼워 보이는거고 실제로는 가볍지 않지. 그리고 그 경계에서 발생한 경험을 나누는 상호 과정을 통해서 서로에 대한 폭 넓은 이해와 둘 사이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도 안다. 너무 이상적인 말이라는걸.

정신 없음에 적응이 된 요즘이다. 예정 마감일 보다 이틀이 늦어지긴 했지만 뭔가를 쓰긴 썼다. 사방 팔방에 이 사탕 더미에 대해 아는 척을 해 놓아서 오늘을 기점으로 더 이상 이 작품에 대해 호들갑을 떨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는 다른 작품들도 남겼지…. ✨ 어수룩한 이 글에 관심을 가져주는것에 너무너무 감사해하고 좋아하지만, 직접적인 표현은 아무래도 좀 부끄럽다. 그래도 저 밑에 ‘좋아요’를 꾸욱 눌러준다면 감자가 계속해서 뭔가를 해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 같다. 이렇게 세번째 글 쓰기 숙제는 ㅃ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