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숙제: 나의 나댐 vs. 나의 나 됨

 
 

왜, 이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사람. 나는 그 반대의 경우이다. 분명 말해주는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찰떡같이 말해주었지만, 듣는 나는? 개떡같이 알아듣는다. 그래서 웃지 못할 이야깃거리들이 종종 생기기도 한다. 미국에 온 지 오래되어서, 또는 한국어가 서투르기 때문에 이런 소소한 일들이 발생하는 거라고 자신을 위로하기엔 나는 한국말의 재미를 너무나도 잘 아는 한국인이다. 슬프지만 내 귀가 어둡다는 사실을 이쯤에서 받아들이자.

하루는 운전을 하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을 때다. 적막함이 싫어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어떤 노래를 들으면 좋을지 생각해본다. 딱히 듣고 싶은 노래가 없다. 문득 엄마가 제~~발 좀 들어보라며 카톡으로 보내 주신 어느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난다. 그래. 오늘은 이거다. 목사님께서 열변을 토하시며 말씀을 전하신다. 솔직히 귀에 쏙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도 조용한것 보다는 나으니까 계속 틀어 놓는다. 별생각 없이 흘려듣다 어느 한 부분이 귀에 와 박힌다. “나의 나댐은 다 하나님 은혜라.” 어…? 목사님…? 집중해서 더 들어본다. 아…나의 나 됨…

엉뚱하게도 이때 부터 나의 묵상이 시작된다. 나는 지금 굉장히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을 지닌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현재 내가 수강하고 있는 대부분의 수업은 학생들에게 개인의 성장 배경과 그동안 겪어왔던 삶의 경험들의 중요성을 계속해서 강조하며, 그로부터 형성된 고유한 존재인 내가 다양성의 상징인 미국이라는 사회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게 한다. 학생들도 본인의 자아 정체성을 표현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 몇몇 학생들은 불안했던 성장 과정을 지나 그때보다는 조금 단단해진 본인의 현재 모습에 취해 종종 선을 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를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중산 노동층 가정에서 자라 미술계의 유리천장을 깨 보겠다며 고군분투하는 이민 1.5세 동양 여성? 나의 사회적 정체성보다 나를 더 잘 설명 해 줄 수 있는 것은, 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고 그의 자녀라는 것이다.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수많은 얕고 깊은 굴곡들 속, 작고 보잘것없는 나를 지금까지 존재하게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셨고, 한시도 포기하지 않으시며, 나를 그의 청지기로 성장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경험하여 알게 하셨다. 나의 지금의 나 된 것은 내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닌, 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었음을 깨닫게 하셨다. 그분의 그 크신 은혜와 계획하심을 알고 나니, 그동안 내가 나 된 것을 자랑하며 살아 온 나의 나댐에 괜히 부끄러워져서는 아무도 없는 차 안에서 혼자 입을 삐쭉여본다.   

나의 나 됨과 나의 나댐은 고작 한 글자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얼핏 듣기에는 그 차이가 크게 느껴지지 않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사소하게 느껴지는, 하지만 전혀 사소하지 않은 한 글자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 차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나면 나의 나 됨이 나의 나댐이 될 수 없어진다. 참. 한국말이 재미있단 말이야.  

새 학기도 시작되었고, 개인적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일들도 많아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요즘이다. 일 욕심은 좀 없어도 되는데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자꾸만 일거리를 만들어낸다. 몰라. 수습은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격주로 글을 써보려고 했는데, 또 밀려버렸다. 계획대로 되면 그게 계획이겠어. 계획대로 되지 않는게 계획이지. 그래도 한달은 넘기지 않았다^^; 여튼.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써보려고 했는데 또 신앙 이야기를 해버렸다. 다음번에는 조금 가볍고 엉망진창인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어수룩한 이 글에 관심을 가져주는것에 너무너무 감사해하고 좋아하지만, 직접적인 표현은 아무래도 좀 부끄럽다. 그래도 저 밑에 ‘좋아요’를 꾸욱 눌러준다면 감자가 계속해서 뭔가를 해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 같다. 이렇게 두번째 글 쓰기 숙제는 ㅃ염:)

글쓰기 숙제: 절대 자신감. 가보자고!

 
 

  글쓰기 숙제가 주어졌다. 사실, 당장에 써야 할 글이 산더미이다. 나는 2년차 대학원생. 졸업을 위해 최소 80장 가량의 졸업 논문을 써야 하지만, 현재 스코어: 달랑 한장. 논문 제목과 내 이름만 적어 놓고는  ‘시작이 반’ 이라며 정신 승리를 해본다. 근데 또 글쓰기라니요. 주여.

    글쎄. 무엇을 이야기 하면 좋을지,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지 곰곰히 생각해 본다. 내가 만난 하나님에 대해 쓰면 좋을까? 미국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며 경험 했던 것들을 쓰면 좋을까? 아니면, 내 관심 분야인 현대 미술과 그 감상에 대해서 쓰는게 좋을까? 나는 영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성숙한 면이 없는데, 이미 삶의 풍파를 겪고 겪으신 어른들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저 치기 어린 요즘 세대의 투덜거림으로 귀엽게 봐 주시겠지. 그렇다고 마냥 어린것도 아닌데. 이러나 저러나 생각만 많아지는데, 작가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없다’만 아니면 된다고.

    그렇다면. 못할건 또 뭐람. 가보자고. 내가 현재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서는 지난 8주동안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두려움 없는 삶의 비결 ‘절대 자신감’ 이라는 주제로 순모임을 가졌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불안의 유형들을 성경 속 인물에서 찾고, 우리는 한없이 작고 약하나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평강과 안정을 누릴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진정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음을 나누는 값진 시간이었다.

    어느 한 주는 욥이 마주한 고난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는 거친 생각을 가진 욥, 불안한 눈빛의 세 친구, 그걸 지켜보던 엘리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열등감과 그 원인중에 하나인 비교의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욥기 32장에서 알 수 있듯 엘리후는 욥과 세 친구보다 나이가 어린 인물이다. 연륜도 많지 않아 본인의 분명한 의견이 있음에도 그저 뒤에서 지켜보고 있을 뿐, 그것을 말 하길 주저하였다. 욥과 세친구의 논쟁을 지켜보던 엘리후는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욥 32:8) 라고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그리고는 엘리후는 욥의 고난에 대한 본인의 시각을 무려 5장에 걸쳐 (32장-37장) 제시하고는 홀연히 사라진다. 후…엘리후..너란 사람…그저 한 줄기 빛…*

    우리를 지혜롭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내가 사회 경험이 많기 때문에, 공부를 잘/오래 했기 때문에, 성경 지식을 많이 알기 때문에 지혜롭다고 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엘리후의 이야기를 통해 얼마나 계속 될 지 모르는 이 글쓰기 숙제에 대한 용기를 얻어본다. 이 용기는 ‘오랜 시간 본인의 경험들로 확립된 어른들의 견고한 사고 방식은 깨어져야만 하며, 청년들의 유동적이고 열린 사고 방식이 가치가 있고 더 존중 받아야 한다.’ 라는 식의 용기 (객기)가 절대 아니다. 우리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 다양한 시각을 나누고자 하는 용기. 각자의 배경에 얽매이지 않는 더 깊고 풍성한 사고를 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고자 하는 용기. 조금은 어설프더라도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로써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아가고자 하는 용기. 뭐 이정도로 해두자.

    여하튼. 첫 숙제는 이렇게 마무리 지어 본다. 글이 실릴 곳이 기독교 매체이다보니, 첫 시작을 하나님 이야기로 시작해 보았다. 글도 제법 얌전한 편이다. 앞으로는 조금 더 다양한 이야기로 마음껏 까불어 볼 계획이다. 어수룩한 이 글에 관심을 가져주는것에 너무 너무 감사해 하고 좋아하지만 직접적인 표현은 아무래도 좀 부끄럽다. 그래도 저 밑에 ‘좋아요’를 꾸욱 눌러준다면 감자가 계속해서 뭔가를 해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 같다. ㅃ염:)